Flag of Japan Flag of South Korea 송풍구 8호 7호 6호

<들어가는 말>

해마다 국내에는 4만 건 이상의 화재가 발생합니다. 그중에는 개인에 대한 원한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에, 혹은 돈을 노려 불을 지른 다양한 방화 사건이 섞여 있습니다. 대부분이 불타버린 현장, 남은 몇 조각 단서를 찾아 범죄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은 고난도의 퍼즐 게임과도 같습니다. 방화는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지기도 하죠. 진실 규명에 실패할 경우 그 결과는 때때로 치명적입니다.

관련 국가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요?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이 방화 의심 사건 조사의 이면을 파헤쳤습니다.

안산, 2005년 가을

2005년 10월 30일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14년 전 경기도 안산으로 가봅니다. 2005년 10월 30일 새벽, 다세대 주택에 난 화재로 여성 2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불이 난 원인에 대해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모기향 불을 지목했습니다. 살아남은 다른 가족은 방화 직전에 가입한 보험 덕분에 거액의 보험금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4년 뒤의 반전.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뜻밖의 사실을 찾아냅니다. 2005년 안산 화재는 방화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범인은 강.호.순.

강 씨가 부녀자 7명을 상대로 저지른 잔인한 연쇄 살인의 예고편과 다름없었습니다. 방화 살인범이 거리를 활보하도록 방치한 수사 당국. 그리고 꼬리를 물고 이어진 비극. 잘못된 화재 감식 · 감정과 부실한 수사의 위험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였습니다. 잠시 당시 사건 현장으로 들어가 볼까요?

광주, 2017년 겨울

다시 12년이 지나고 한 가정집에서 끔찍한 방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17년 12월 31일 새벽, 광주광역시의 아파트에서 일어난 화재로 어린 3남매가 안타깝게 숨졌습니다. 경찰은 아이 엄마가 이불에 담뱃불을 끄다가 실수로 불을 낸 실화(失火) 사건으로 결론 냈습니다. 하지만 불과 3주 후 검찰 수사에서 아이 엄마의 거짓말과 방화 혐의가 드러납니다.

부실 방화 수사

평행 이론

2005년 강호순 방화 사건과 2017년 광주 3남매 사망 방화 사건
10여 년의 시차가 있지만 두 사건의 처리 결과를 보면 놀랄 만한 유사점이 발견됩니다.

2005년
2017년
인화성 물질 존재 가능성
현장의 방화 정황
인화성 물질 사용 가능성
인화성 물질 사용 정황 무시
수사 결과
인화성 물질 사용 정황 무시
미흡
기관 공조
미흡
섣부른 결론
진술 조사
아이 엄마 말 과신
검찰 수사서 뒤집혀
섣부른 결론
검찰 수사서 뒤집혀
원인 규명에 한계
국과수 감정
원인 규명에 한계

눈앞에서 희대의 범죄자를 놓쳐버린 강호순 방화 사건. 그 후에도 국내 화재 조사 체계의 허점은 그대로였습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그 실상을 더 파헤쳐보겠습니다.

방화 비율 2%의 수수께끼

한국의 방화 통계는 미스터리입니다. 전체 화재 중 방화나 방화의심(확증 단계는 아니나 방화가 의심되는 화재 사건)으로 판정된 화재의 비율(이하 '방화 비율')이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2006년에 10%대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은 뒤 이후 꾸준히 줄어들어 2017년에는 2%까지 내려갔습니다. 약 10년 만에 5분의 1로 감소한 것입니다. 2%대의 낮은 방화 비율은 올해 들어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2%라는 수치는 소방서 관할 구역당 방화나 방화의심으로 판정되는 화재가 3달에 한 번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갖가지 갈등과 모순이 깊어지는 현대 사회, 그에 따른 사회 병리 현상 중 하나로 해석되기도 하는 방화 사건들. 5대 강력 범죄의 하나인 방화가 유독 우리 사회에서는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것일까요?

line chart showing decrease of fire events from 2006 (10.7%) to 2017 (2%)

2017년 한일 방화통계

한국의 방화 통계를 이웃 일본과 비교해보면 의문이 더 커집니다. 일본의 방화 비율은 한국보다 줄곧 2~3배 이상 높다가 2017년에는 양국 간 차이가 7배로까지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방화 비율이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본이 총화재 발생 건수는 한국보다 적은데도 불구하고, 방화 집계치는 훨씬 더 많은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한일 공식 방화 통계의 이 현격한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방화 비율

탐색 지도

지역별 • 연도별 방화 통계

통계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지도와 차트로 탐색해 보겠습니다. 지난 10여 년 간 방화의 감소는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지역적 편차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곳은 어떻습니까?

화재 요인 [단위: %]

    방화비율이 크게 달라졌어요
    소방서 순위 차트

    이번에는 각 소방서 관할 구역을 들여다보겠습니다. 2007년, 2008년 2년과 2016년, 2017년 2년을 묶어서 양 기간 사이의 변화를 비교했습니다. 방화 비율이 많이 떨어진 순서로 소방서 관할 구역 50곳을 정리했습니다.

    • 2007년 2008년 방화비율

    • 2016년 2017년 방화비율

    2007년과 2008년에는 19.6%에 달하던 인천 계양소방서의 방화비율은 2016년과 2017년에는 1.09%대로 급감했습니다. 1%대는 해당 소방서 구역에서 방화로 잡히는 화재가 거의 없다는 얘기입니다. 계양소방서는 2007년에 총 269건 화재 중 60건이 ‘방화와 방화의심 화재’(이하 ‘방화’로 통칭) 에 해당했지만 2016건에는 방화 판정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2017년에는 3건에 불과했습니다. 서울 용산소방서도 2007년에는 총 화재 224건 중 47건이 ‘방화’로 판정됐지만, 2016에는 ‘방화’가 1건, 2017년에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기자는 순위표 20위 안에 들면서 방화 비율이 소수점 자리 한 자리 기준으로 1%대 이하인 소방서 6개 구역을 골라냈습니다. 인천 계양소방서, 서울 용산소방서와 강남소방서, 대전 서부소방서, 울산 동부소방서, 부산 해운대소방서가 해당합니다. 이제부터 이들 6개 소방서 관할구역을 ‘관심 구역’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관심 구역에서 2016년, 2017년 2년 간 일어난 화재는 모두 2,663건입니다. 이들 소방서 관할 구역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더 특이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머신러닝으로 사건 추적하기

    기자는 6개 관심 구역에서 일어난 화재를 조사하는 데 전통적인 취재 방법에 더해 좀 더 효율적인 기법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소방 화재현장 조사서를 모두 수집해 전수 조사하는 대신 데이터 처리 분석기법인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을 활용해 문제 화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소방 화재 데이터에는 발생 시간대와 발화 열원, 최초 착화물, 인명 및 재산 피해액, 날씨, 화재 장소 유형 등 다양한 변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어떤 경우에 방화일 가능성이 높은지를 ‘랜덤 포레스트’(Random Forest)라는 방식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에 학습시켰습니다.

    의사 결정 나무

    decision-tree

    랜덤 포레스트 (Random Forest) 작동방식

    random-forest visualization

    랜덤포레스트는 어떤 도구로 어떻게 불이 붙었나? 불이 붙은 재료는 무엇인가? 몇 시에 화재가 발생했나? 어느 정도의 피해가 났나? 등등의 다양한 질문을 던져 여러 개의 ‘사다리 타기’를 거친 뒤, 각각의 화재가 방화에서 비롯됐는지 아닌지 확률적으로 추정하는 분석 방법입니다. 마치 ‘스무고개’식 사다리를 타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과 같은데요. 이 과정을 ‘의사결정 나무’라고 부릅니다. 랜덤 포레스트는 ‘의사결정 나무’를 수백 개 만들어 그중에서 투표로 답을 고르듯이 적합한 결론을 찾아갑니다.

    앞서 언급한 6개 관심 구역을 제외한 전국의 다른 소방서 구역 207곳의 2년 치 데이터로 컴퓨터를 학습시키고, 이렇게 만들어진 예측모델로 관심 구역에서 발생한 화재가 방화인지 여부를 추측하도록 했습니다. 컴퓨터는 이 방화 분류 알고리즘의 정확도를 85~88% 정도로 추산했습니다.

    분석 결과, 소방서는 ‘방화’로 판정하지 않았지만, 컴퓨터 알고리즘은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류한 화재가 324건에 달했습니다. 다만, 이 머신러닝 예측 모델은 입력 데이터에서 오는 한계와 오차가 명백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기자는 방화일 확률이 80% 이상 넘는 것으로 분석된 화재를 중심으로 다시 검토했습니다.

    1. 화재 데이터에서 머신러닝으로 분석
    2. 소방화재조사서 전문가 검토
    3. 경찰 내사결과 취재

    머신러닝 분석으로 의문의 화재를 1차로 추출한 뒤, 문헌 조사와 취재를 통해 방화의심 사건을 2차, 3차로 걸러낸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한 분석 방법에 대한 글과 분석 코드는 관련 깃허브(GitHub)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분석했나

    우리 동네 수상한 화재 보고서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결국 이들 화재 가운데, ‘수상한 화재’ 24건을 골랐습니다. 방화 의심 정황이 있었지만, 소방도 경찰도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사건들입니다. 화재 개요와 조사 보고서 사본을 스프레드시트 형태로 공개해 시민들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자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입수하거나 취재로 확인한 내용입니다.

    우리 동네 수상한 화재 보고서 1 보기

    이들 화재는 우리 주변에서 목격할 만한 ‘작은 불’이 대부분입니다. 소방은 주로 원인 미상 판정을 했고, 경찰도 내사종결(16건)을 하거나 아예 접수하지 않은 경우(6건)도 있었습니다. 국내 화재 조사 시스템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례들입니다. 머신 러닝으로 찾아낸 수상한 화재 사건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볼까요?

    서울 강남 아파트 복도 화재

    2017년 5월

    작년 5월 어느 날 새벽 2시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CCTV에 한 남성이 찍혔습니다. 그리고 기묘한 행동이 시작됐습니다.

    소방서가 원인을 밝히지 못한 이 화재가 발생하고 담당 경찰서가 즉시 어떤 조치를 내렸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화재 발생 며칠 뒤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진정서가 접수되자 비로소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CCTV에 잡힌 인물의 신원에 대해 아파트 거주자들을 상대로 탐문을 했지만, 끝내 남성의 정체와 화재 원인은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범죄심리 전문가는 방화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배상훈 교수 사진 이 남성의 행동은 방화범들에서 자주 보는 패턴이다. 작은 불을 질러 주변의 반응을 떠보려는 ‘간 보기식’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 불이 난 뒤에 현장 부근에 머문 것 역시, 불 난 뒤 주변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방화범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배상훈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

    서울 용산 빈집 화재

    2017년 12월 23일

    자정 너머, 서울 용산의 빈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소방 조사관과 관할 경찰서 형사는, “2층 거주자는 술에 만취해,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던 2층 거주자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소방서는 원인 미상 판정을 했고, 경찰은 전기적 요인에 의한 화재로 결론 짓고, 조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경찰서 측은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당일 육안 감식 결과 ‘단락흔’ (전선이 녹아 끊어진 흔적)이 확인된 점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단락흔만 감식 또는 감정해서는 전기적 문제로 불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래저래 많은 의문이 남는 사건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눈앞에서 희대의 살인범을 놓쳐버린 강호순 방화 사건 후에도 국내 화재 조사 체계의 허점은 보완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론화는 물론 체계적인 현실 진단도 없었습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실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석란정 화재가 남긴 의문

    2017년 9월

    강원도 강릉의 목조문화재 석란정이 전소된 화재를 기억하시는 분 많으실 겁니다. 잔불 정리과정에서 건물이 무너져 안타깝게도 불을 끄던 소방관 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화재 원인에 대해 소방과 경찰이 합동 조사를 했지만, 두 기관은 극명하게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소방 당국은 방화가 의심되는 사건으로, 경찰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본 것입니다. 당시 소방 화재현장 조사서와 경찰의 내사 결과 보고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서는 180도 다른 분석 결과와 판단을 담고 있었습니다.

    석란정 소방 화재조사서· 경찰 내사결과 보고서 감정서 사본 바로 가기

    같은 현장...다른 조사 결과

    방화 의심 단서
    소방 당국
    경찰서, 국과수
    인화성 성분 확인
    시너 성분, 페인트 추정 성분 검출
    검출 안 됨
    흰 페인트 육안 확인
    페인트 연소 잔해 다수의 장소서 발견 (문턱 포함)
    언급 없음
    포어패턴
    온돌, 마루방1, 마루방2 에서 모두 발견
    “발화지점과 원인을 특정한 만한 특이 연소 형상 없음”
    틈새 연소 패턴
    마루방1, 마루방2에서 발견
    “발화지점과 원인을 특정한 만한 특이 연소 형상 없음”
    문틀 연소
    하부 문틀 집중 연소
    언급 없음
    다수 발화 지점
    확인
    언급 없음
    화재 원인
    방화 의심
    원인 미상

    방화 키워드 풀이

    인화성 물질
    기름, 시너, 알코올 등 불이 잘 붙는 성분. 화재 현장에서 검출되면 누군가 불을 지르며 연소 촉진제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된다. 완전히 연소하거나 휘발할 경우에는 시료 분석에서 검출되지 않기도 한다.
    포어 패턴
    인화성 액체가 쏟아진 듯한 모습으로 바닥이 불에 탄 자국이다. 일반적으로 방화의 정황으로 해석한다.
    스플래시 패턴
    인화성 액체가 바닥에 튀긴 듯한 모습으로 불탄 흔적이다. 포어 패턴과 함께 나타날 수 있으며 방화의 정황으로 해석한다.
    틈새 연소 패턴
    목재 바닥 틈새의 밑단으로 인화성 액체가 흘러 들어가 강하게 탄 흔적이다. 일반적으로 방화를 위해 유류 등을 뿌려 나타난 흔적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다중 발화 지점
    화재 현장에서 불이 두 곳 이상의 지점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흔적이다. 방화의 유력한 증거로 해석한다.

    소방·경찰의 동상이몽(同床異夢)

    혹자는 반문할지 모릅니다. 소방과 경찰이 꼭 같은 화재 조사 결과를 내놓을 필요가 있냐고 말이죠.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소방이 잘못된 판단을 했으나 경찰이 바로잡는 경우도 있고, 소방이 진실에 더 근접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석란정 화재뿐 아니라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수집 분석한 수상한 화재 사례를 보면, 소방과 경찰은 종종 물과 기름처럼 따로 움직였습니다. YTN은 이런 사례 19건을 모은 ‘우리 동네 수상한 화재 목록2’를 별도로 공개했습니다. 소방은 방화 의심 판정을 했지만, 경찰은 소홀히 처리하거나 내사단계에서 사건을 종결한 사례입니다.

    우리 동네 수상한 화재 보고서 2 보기

    경찰 방화수사 들여다보니…

    경찰도 매년 천여 건의 방화 사건을 처리합니다. 어떤 화재였을까요? 경찰은 개별 방화 사건에 대한 데이터를 좀처럼 외부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취재진은 대신 머신러닝 분석에서 관심 구역으로 설정했던 6개 소방서 구역에 해당하는 경찰서에 대해 정보공개청구했습니다. 요청한 내용은 2016년과 2017년 관내에서 처리한 방화 사건의 내역입니다. 정보 공개를 거부한 대전 지역의 경찰서를 제외하고 서울 강남, 용산경찰서와 인천 계양경찰서, 울산 동부, 중부경찰서, 부산 해운대경찰서 등 6개 경찰서의 방화 사건 79건의 개요를 입수했습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은 해당 화재 내역을 스프레드시트에 담아 공개했습니다.

    경찰서방화사건개요

    방화사건의 면면을 보면 공공장소에 불을 낸 경우, 주택이나 업소에 불을 내려다가 미수에 그친 건 등 사연도 다양합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술에 취해 홧김에 불을 붙이려 한 경우도 있습니다. 쓰레기봉투나 입간판 등만 태운 비교적 가벼운 화재도 다수 포함됐습니다.

    취재진은 3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 경찰서가 처리한 방화 79건 중 27건, 무려 1/3 (34%)은 불이 나지 않은 방화 미수 또는 방화 예비 혐의 사건이었습니다.
    2. 경찰서가 수사한 방화 79건 중 50건 즉 절반이 넘는 63%는 소방 화재 데이터에는 빠진 별도의 사건이었습니다. 경찰서에는 신고됐지만, 소방에는 통보가 안 간 것입니다. 경찰과 소방이 얼마나 따로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입니다.
    3. 상당수 화재는 현행범과 CCTV를 기반으로 범인을 잡았습니다. 첨단 과학 수사보다는 전통적인 수사 기법으로 범인을 잡은 게 대다수였습니다.

    불 없는 방화

    34%

    27 / 79

    소방은 모른 방화

    63%

    50 / 79

    YTN은 과학 수사의 역할을 검증하기 위해 한 발 더 들어가 전국 17개 지방경찰청에 정보공개청구 했습니다.

    “화재 감식과 감정 등 과학 수사로 방화범을 검거한 성공 사례를 소개해 달라”
    각 지방경찰청의 답변 내용은 뜻밖이었습니다.
    “성공사례가 없거나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방화 사건은 화재감식만으로 방화임을 단정 지을 수 없고 CCTV 및 관계자 진술 등 다양한 자료 및 증거를 토대로 종합적인 수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 (부산지방경찰청) 이라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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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2015년부터 2018년 9월 14일까지 감정한 화재는 10,410건으로 이 가운데 방화나 방화의심 사건으로 분류한 건수는 265건에 불과했습니다. (홍익표 의원실 국정감사 국과수 답변 자료) 전체의 2.5%에 불과한 것입니다. 경찰은 재산과 인명 피해가 일정 수준을 넘은 화재만 수사하며, 이 중 조금이라도 범죄 혐의점이 보이는 사건을 선별해 시료 감정을 의뢰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방화 판정 2.5%는 예상외로 낮은 수치입니다.

    이는 화재 감식 감정 기법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화재 수사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CCTV나 목격자 진술처럼 결정적 증거가 남거나, 연소 촉진제 성분이 검출되는 등 방화 의심 정황이 나타나지 않는 한 방화 혐의를 입증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국내의 범죄 통계가 말하는 현황은 딴판입니다. 놀라운 수준의 방화범 검거율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FBI의 방화범 검거율이 20%대에 머물고 있고, 다른 대부분 선진국도 2~30%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독 한국은 90% 내외의 검거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방화범 검거율

    90.7 %

    한미간의 현격한 방화범 검거율 차이는 착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방화 의혹이 있더라도, 수사 과정에서 범인의 행적이 잡히지 않으면 경찰은 당연히 고민하게 됩니다. '더 수사할까, 미제 사건으로 남길까, 아니면 내사단계에서 사건을 종결할까.'

    내사 종결한 화재는 방화가 아니라 일반 화재로 분류됩니다. 미제 사건으로 남겨둘 수도 있는 화재 사건을 원인 미상 화재 혹은 전기화재로 규정해 내사 종결한다면, 방화건수는 줄어들고, 검거율은 더 높아지게 됩니다. 검거율 산정 공식에서 분모인 방화 사건 숫자가 줄어드니 검거율은 높아지는 원리입니다. 의도적이건 오랜 관행이건, 이렇게 되면 현상을 오도하는 통계가 만들어집니다.

    방화범 검거율 =

    방화범 검거 건수

    방화 사건 발생 건수

    x 100

    단락흔의 함정

    화재 관련 뉴스를 보면 “전선이 끊어진 흔적으로 미뤄 합선으로 불이 났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하고 있다” 는 식의 언급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전선이 녹거나 끊어진 흔적’ 즉 단락흔은 전기 화재와 연관되어 자주 거론되는 용어입니다. YTN이 ‘수상한 화재’ 취재를 위해 150여 건의 화재조사서를 입수해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단락흔에 대한 언급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방화 의혹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인데도 수사 당국이 단락흔을 근거로 전기 화재로 결론 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예: 2013년 3월 2일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주점 화재, 2017년 11월 23일 서울 용산에서 발생한 빈집 화재)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단락흔은 거의 모든 화재 현장에서 발견됩니다. 전기적 요인으로 화재가 발생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다른 원인으로 불이 나서 그 결과로 전선이 녹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둘 사이를 100% 구별하는 것은 현재의 화재 감식과 감정 기술로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화재 현장에서 확인된 단락흔 사진1
    화재 현장에서 확인된 단락흔 사진1.

    단락흔은 1차 단락흔(합선이 화재의 원인이 된 경우)와 2차 단락흔 (불이 나서 그로 인해 절연 피복이 녹아 합선이 일어난 경우)과 용융흔 (합선과 무관하게 화재의 열로 전선이 녹은 경우)으로 나뉩니다.

    화재 현장에서 확인된 단락흔 사진2
    화재 현장에서 확인된 단락흔 사진2.

    국과수는 “단락흔이 발견된 부위를 중심으로 주변으로 연소가 확산된 흔적이 있고, 단락흔 외의 다른 발화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1차 단락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답변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육안 감식은 물론 정밀기기를 활용한 감정으로도 단락흔 성격을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는 게 국과수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국립수사연구소자료

    실제로 민사 재판에서는 단락흔이 화재 원인을 밝혀주는 독립적인 증거 자료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국이 화재조사를 할 때는 단락흔 감식과 감정 결과에 기대어, 자의적으로 전기화재 여부를 판정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자칫 방화 등 다른 요인으로 일어난 화재가 전기 화재로 잘못 둔갑해버리는 것입니다. 단락흔에 대한 오용 가능성은 화재조사 분야의 해묵은 쟁점일 뿐 아니라, 알만한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합니다.

    고시원 6호실의 비밀

    2008년 7월

    2008년 7월 일어난 용인 고시원 화재는 단락흔과 관련된 논쟁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7명이 숨지고 6명이 다치는 인명피해가 나며 고시원 화재 관리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 이 사건은 화재 원인 조사와 관련해서도 의문을 남겼습니다.

    고시원 6호실과 8호실, 두 방에서 동시에 불이 난 정황이 쟁점이었습니다. 다중 발화 지점 화재 현장에서 불이 두 곳 이상의 지점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흔적이다. 방화의 유력한 증거로 해석한다. 이라면 방화의 정황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최종 수사 결과 발표에서, 6호실에서 합선으로 불이 난 뒤 에어컨 송풍구를 따라 불이 다른 방으로 확산했다고 봤습니다. 즉 불탄 잔해가 이웃 7호실을 건너뛰고 8호실 송풍구를 통해 침대 매트리스 위로 떨어진 것이란 해석입니다.

    화재 현장이 사라진 현재, 경찰과 소방의 주장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다시 검증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당시 화재현장조사서를 보면 소방당국은 포어 패턴도 거론하며 방화 의심 정황을 거론했습니다. 국과수와 경찰은 포어 패턴 인화성 액체가 쏟아진듯한 모습으로 바닥이 불에 탄 자국이다. 일반적으로 방화의 정황으로 해석한다 을 부인했습니다. 대신 6호실에서 발견된 단락흔과 주변의 연소 확산 흔적을 전기 화재의 유력한 단서로 제시했습니다.

    용산 고시원 화재 조사서 및 감정서 사본 바로가기

    소방측 의견

    소방은 누군가 6호 방에 기름을 뿌려 처음 불을 지르고 이어서 8호 방에 인화성 물질을 뿌려 불을 냈다고 생각하는 주장

    경찰측 의견

    경찰은 6호방 송풍구를 타고 8호방 송풍구로 불씨가 떨어져 불이 났다고 생각하는 주장

    전기화재

    탐색 지도

    지역별 • 연도별 전기화재 통계

    전기 화재의 발생 실태를 전국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소방 화재 데이터에 따르면, 국내 주택 화재 중의 전기 화재 비율은 2016년 기준으로 19.9%입니다. 미국의 6.5%에 비해 3배나 더 높은 수준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지역은 어떻습니까?

    2017년 전기화재 비율

    2017년 기준으로 전기 화재 비율이 전체 화재의 40% 선을 넘은 시군구는 5곳이나 됩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가 44.7%로 전기 화재 비율이 가장 높고 5위안에 든 나머지 4곳도 모두 수도권입니다. 일부 전기 배선이 낡고, 가전제품의 사용이 늘었다는 점을 고려해도 40%를 넘는 전기 화재 비율은 주목할 만한 수치입니다.